정당으로서 가져야 할 풍토가 빈약한 정당. 매뉴얼도 없는 정당. 한상진 민주통합당 대선평가위원장(서울대 명예교수)의 말 한마디 한마디는 송곳처럼 예리했다. 그는 민주당이 아파할 치부를 여지없이 파고들며 촌철(寸鐵)의 비판을 퍼부었다. 3월6일 오전 한상진 위원장은 민주당 대선 평가 1차 중간 발표를 했다. 이날 오후 서울 영등포 민주당사 2층 위원장실에서 가진 <시사저널>과의 인터뷰에서 한 위원장은 대선 패배 이후 반성이 없는 민주당 내 분위기에 대해 “민주주의 상식에 안 맞고, 탐욕적”이라고 일갈했다. 그는 “안철수 전 교수측도 대선 패배에 대해 책임지는 자세를 보여야 한다”는 지적도 빠뜨리지 않았다.
▶ 오늘 대선 평가 1차 중간 결과를 발표하면서 “대선 과정에 책임이 있는 분들은 고백하고 용서를 구하라”고 또 주문했다. 책임 있는 분들이란 누구를 지칭하는 것인가?
흔히 (책임 있는 분들을) ‘친노’(親盧)라고 생각한다. 책임 있는 분들 중에 물론 친노 그룹에 속한 사람들이 있지만, 친노 전체를 말하지는 않는다. 지난 4·11 총선과 대선 과정에서 당을 실질적으로 움직인 세력이 있다. 그분들은 분명 소명감을 갖고 일했지만 결과적으로 패배했고, 국민도 ‘멘붕(멘탈 붕괴’) 상태가 됐다. 당에 대한 유례없는 실망감과 상실감을 갖고 있다. 나는 민주당에 대한 대선 평가를 ‘진실과 화해’의 방식으로 하고 있다. 개인 누군가의 잘못이 아니라 책임 있는 모든 분들이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고백하면 당이 새 출발을 하고 마음의 상처를 추스르고 새 출발을 하는 데 훨씬 도움이 될 것이다. 당이 제대로 가려면 ‘내 탓이요’ 운동이 시작돼야 한다.
▶ 결국 문재인 전 후보를 말하는 것 아닌가?
문 전 후보는 민주당이 인기가 없는 상황에서 선거를 이끌어가는 데 어려움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정치적인 리더십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고, 민주당이 제 역할을 하지 않으면서 큰 상처가 났다. 이런 현상에 대해 (문 전 후보가) 확실하고 분명하게 (과오를) 말씀해주시면 (대선 평가를 하는 데) 시너지 효과가 날 것이다. 물론 이해찬 전 대표 같은 분도 있다. 정치적 책임을 진다는 것은 리더의 중요한 품성이다. 책임을 회피해서는 안 되고 그것을 강요받기 전에 스스로 책임지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
▶ 오늘 발표에서 ‘과오’ ‘실수’ ‘단견’ 등의 표현을 썼다. 구체적인 사례는?
찾으면 많다. 4·11 총선 평가 보고서가 묵살 또는 유실된 사례가 대표적이다. 민주당은 총선 패배 원인을 진단하고 새 진로를 찾기 위해 민주정책연구원을 통해 보고서를 만들었다. 당시는 문성근 상임고문이 대표대행을 맡을 때였다. 만약 민주당이 총선 보고서를 제대로 음미하고 실천했다면, 대선 결과는 더 나았을 것이라고 본다. 하지만 보고서에 대한 보완 조치를 요구하고 문건을 회수해버렸다. 연구원은 ‘보완을 하지 말라’는 것으로 해석했다. 결국 문성근 대표대행 체제에서 박지원 대표 체제로 넘어가면서 보고서는 실종돼버렸다. 문 전 대행 쪽에서는 이를 두고 ‘유실’이라고 주장하지만, 나는 일종의 ‘묵살’이라고 생각한다. 보완하라는 명시적인 지시도 없었고, 회의록도 없었다. 큰 정당이 매뉴얼 하나도 없는 체제로 굴러왔다. 이게 민주당의 현실이다.
▶ 지난 대선 때 후보 단일화 추진 과정의 문제도 있었나?
적지 않은 사람이 지난 대선에서 박근혜 새누리당 후보가 만만치 않은 상대라고 봤다. 그만큼 주의를 갖고 면밀하게 박 후보의 장점과 지지표를 분석했어야 했다. 그러나 당시 지도부는 이런 주장을 귀 기울여 듣지도 않았다. ‘박 후보는 박정희 독재자의 딸’이라는 주장만 했다. 또 단일화만 하면 대선은 이긴다는 논리가 선거운동의 한복판에 있었다. 그것이 민주당으로 하여금 주도면밀한 대응을 하는 길을 막았다. 민주당은 정당이 제 기능을 수행할 수 있는 기본 풍토가 너무 빈약하다. 빨리 업그레이드시켜야 한다.
▶ 한 위원장이 안철수 캠프에서 국정자문단 활동을 한 것을 두고 말이 많다.
대선 평가를 한다는 것은 시쳇말로 잘해야 본전이고, 손해 보기 딱 좋은 일이다. 그래도 김대중 전 대통령과 25년 인연을 맺었고, 그분이 민주당의 뿌리인 만큼 포용과 소통의 정신 그리고 중도 개혁의 정신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할 뿐이다. 안철수 전 교수의 시각을 민주당에 주입시킬 생각은 추호도 없다. 바깥의 시각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민주당의 뿌리를 되찾자는 것이다.
▶ 민주당의 위기는 여전히 진행형이다. 위기의 핵심 요인이 무엇이라고 보나?
민주당이 직면한 가장 큰 딜레마는 국민적인 지도자가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한복판에 계파 문화가 있다. 상호 불신으로 점철돼 있는 계파 문화가 민주당 곳곳에 있다. 이는 친노, 주류의 문제만은 아니다. 비주류는 상대적으로 권력이 주류보다는 적을 뿐이다. 비주류가 주류보다 도덕적으로 더 우월하고 리더십이 있는 것은 아니다.
▶ 대선 패배 이후에도 전당대회 개최 문제를 놓고 계파 갈등이 첨예화됐다. 어떻게 지켜봤나?
대선 평가를 하고 있는데 전당대회를 3월 말로 당기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과거에 대한 반성도 없고 다시 계파 간의 대결과 당권 쟁취를 위한 행보를 보이더라. ‘이건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분명한 입장을 밝혀야 한다고 생각해서 한국선거학회의 대선 평가 토론회에서 작심하고 말했다(그는 2월27일 토론회에서 친노 등 주류측의 퇴진을 촉구한 바 있다). 민주당이 실수를 했는데도 아무도 반성하지 않고 실수를 또 되풀이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그건 민주주의 상식에도 안 맞고 ‘탐욕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이 기득권이다.
▶ 안 전 교수는 대선 패배의 책임이 없나?
민주당이 대선 패배에 책임을 지고 자기 성찰과 반성을 해야 한다면 안 전 교수와 선거 캠프도 마찬가지다. (안 전 교수측도) 적지 않은 지지자들에게 실망과 상처를 줬다. 국민의 욕구를 충족시키지 못한 단견이 있었다. 민주당을 향해서 성찰을 하라고 요구하는 것처럼, 안 전 교수 쪽도 성찰하고 넘어가야 한다. 그것이 쌍방 간 대화를 하는 시작점이다. 그러면 정치적인 파괴 효과가 있을 것이다. 그런 가능성을 현실로 만드는 것이 정치의 묘미 아닌가.
▶ 안 전 교수에게 단일화 협상 중단이나 갑작스런 후보직 사퇴, 미국행 등에 대해 물어본 적은 없나?
그럴 여유가 없었다. 대선 당시 안 전 교수가 마음의 상처를 크게 입었다. 지금은 많이 풀렸겠지만…. (안 전 교수가 문 전 후보의) 선거운동을 돕기는 했지만 마음이 즐거운 것은 아니었다.
▶ 안 전 교수가 민주당으로 들어올 가능성은?
지금으로서는 전혀 없다. 민주당이 준비돼 있지 않다. 안 전 교수가 온다면 환영한다고는 하지만 터전이 없지 않나. 민주당 내에서도 새로운 리더십이 나타나고 체질이 바뀌는 변화가 있어야 한다. 대선 과정에서 생긴 불신과 앙금을 눈이 녹듯이 풀어내는 과정이 꼭 필요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