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상진(이하 한) 현재 동아시아에 낀 먹구름이 쉽게 걷힐 수 있을까? 일차적인 원인은 아시아에서 근대화에 먼저 성공한 일본이 근대화 과정에 수반됐던 엄청난 국가폭력의 문제를 제대로 인식하지 않고 있다는 데 있다. 여기에 한국의 이명박 대통령이 독도 방문, 일왕 사과 요구 발언 등으로 방아쇠를 당겼고, 그 연쇄적인 파장 효과가 일어나고 있다. 동아시아의 미래에 그나마 기댈 언덕이 있다면, 국가 권력의 차원이 아니라 ‘상식을 갖춘 시민들’이 서로 이해하고 격려하며 국가권력을 자국 중심이 아니라 동아시아라는 넓은 맥락 안에서 풀어갈 수 있도록 협력하는 것이라 본다.

강상중(이하 강) 한·중·일 3국의 근대화 과정에는 국가중심주의 의식이 뿌리 깊게 박혀 있다. 동아시아의 경우 시민사회를 기반으로 하여 국가가 형성된 것이 아니라, 외부로부터의 압박에 대응해 국가를 세우는 것을 우선으로 삼았고 그 위에 시민사회와 민주화가 들어섰기 때문이다. 동아시아의 시민사회는 상당히 약하다.

한 한국과 일본 사이에는 약간 차이가 있다. 한국에선 강력한 학생운동을 경험한 세대가 사회에 진출해 개혁을 선호하는 입장을 내보이고 있고, 인터넷과 같은 수평적·쌍방향 소통 혁명과 맞물리고 있다. 대중의 탈정치화 현상이 시민사회의 힘으로 극복되어가는 과정이다. 현재 집권당과 이명박 정부에 염증 느끼면서도 민주당을 지지하지 않는 회의적인 중간 대중이 있는데, 이들이 탈정치화되면 굉장히 위험해진다. 따라서 대안을 찾으려는 몸부림이 시민사회로부터 터져나오고 있고, 그것이 ‘안철수 효과’로 나타나고 있다고 본다. 

강 일본에선 지난 25일 아베 신조가 최대 야당인 자민당 총재로 선출됐다. 한국에서는 ‘보수 대 리버럴·개혁’이라는 분명한 전선이 있고 이 전선을 중심으로 하여 여야가 경쟁하지만, 일본 정치에선 리버럴·혁신·진보 등으로 부를 수 있는 세력이 아주 약화되어 있다. 따라서 한국에서는 ‘과거사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지금과 다른 새로운 틀을 짤 것인가, 아니면 종래의 틀을 유지할 것인가’ 같은 폭넓은 선택이 가능한 반면, 일본에서는 ‘조금 더 성장하는 것이 가능할 것인가’, ‘시민들이 안심하고 살 수 있을 것인가’ 같은 국가를 중심축에 놓는 좁은 선택지만 있다. 

한 강 교수는 일본의 보수적인 정치세력이 대중의 불만을 이용해 ‘전후 체제를 벗어나자’는 움직임을 불러일으키고, 이것이 헌법 개정이나 집단적 자위권 강화로 이어질 가능성을 우려했다. 다만 일본의 ‘상식을 갖춘 시민’이 과연 그런 시도를 지지할까? 최근 나는 서울과 베이징에 있는 시민들을 상대로 실시한 조사에서 일본의 과거사 청산과 원자폭탄 피해에 대한 인식을 연결해봤다. 일본이 잘못했기 때문에 미국의 원자폭탄 사용은 정당하다고 보는 ‘징벌적 정의’ 관점과 이와 반대로 일본이 잘못했지만 원자폭탄 사용은 부당했다고 생각하는 ‘무조건 배려’ 관점이 나타났다. 징벌적 정의 관점을 가진 시민이 더 많긴 했지만, 무조건 배려의 관점을 가진 시민들도 적지 않았다. 국가 사이에 갈등이 있더라도, 시민의 관점에서 원폭으로 받은 상처를 이해·배려하고 그것을 치유하는 과정에 동참할 수 있는 잠재력을 갖춘 동아시아 시민이 적지 않다는 사실이 무척 고무적이었다. 

강 일본은 독일과 달리 ‘피해자’라는 인식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독일은 1960년대 고도성장기에 젊은이들 중심으로 역사에 대한 문제인식을 크게 키우며 이를 극복했고, 이 때문에 ‘패전은 곧 해방’이라는 인식으로 노르망디 상륙작전 기념일을 연합국과 함께 축하한다. 그러나 일본에서 패전은 여전히 ‘굴욕의 날’이다. 전후 도쿄재판에는 아시아가 참여하지 못해 식민지배에 대한 문제 제기가 이뤄지지 못했고, 60년대 고도성장기에도 신마르크스주의를 내세운 좌파의 움직임이 과거사 극복을 앞섰다. 또 전쟁의 기억이 점차 사회적 교육의 단계로 넘어가면서 기억을 날조하고 뜯어고치는 현상까지 나타났다.

한 오늘날 일본이 진화해오는 과정에는 여러가지 요인들이 있겠지만, 구조적으로는 미국의 정책, 특히 냉전정책이 너무나도 큰 영향을 끼쳤다고 본다. 소련을 견제하며 일본에 독점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고 싶어했던 미국의 정책은 도쿄재판에서 제국주의 범죄가 언급되지 못하게 만들었고, 일본을 강력한 연합국가로 만들기 위해 보수 세력의 입지를 강화시켰다. 이런 상황 속에서 일본 정치는 갈수록 보수화됐고, 중국의 부상을 맞아 주변국과의 인식 격차가 자꾸 벌어지고 있는 상황이다. 

강 동아시아에서 미국의 헤게모니가 약화되면서, 한국은 ‘미국·중국과 함께 손잡고 국가안보와 경제성장을 동시에 추구한다’고 생각할 정도로 선택의 폭이 넓어졌다. 이런 상황은 시민사회가 냉전·반공 이데올로기로부터 벗어나는 데 영향을 줬다. 반면 국가와 개인의 거리에 따라 인간의 가치가 정해지는 일본에서는 ‘침묵하는 다수’의 목소리가 표면화되지 않는다. 국가의 잘못된 전력정책에 따라 민간인이 커다란 희생을 겪었는데도 강한 반대와 저항의 목소리가 나오지 않은 후쿠시마 원전사고가 대표적인 사례다. 동아시아 내부에서 여성의 인권에 대한 문제의식이 더 강해져서 여러 나라들의 공동 조사, 증언 채록 등이 이뤄지고, 이를 통해 동아시아 전쟁의 기억에 대해 국가들이 서로를 이해하는 계기가 만들어져야 한다. 국경을 넘는 시민사회 연대가 필요하다. 

한 전적으로 동의한다. 보수 집권체제는 시민의 삶과 거의 무관한 이데올로기, 영토 등의 문제를 정치적 어젠다로 삼는다. 이와 다른 시민사회적 어젠다 설정을 위해선, 다른 나라의 ‘상식을 갖춘 시민’ 또는 ‘침묵하는 다수’가 어떤 사람들이며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서로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한국·일본·중국 3국의 시민들이 서로 무슨 생각을 하고 상대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 정기적으로 조사하고 캠페인으로 연결시키는 ‘동아시아 시민 바로미터’와 같은 것을 함께 만들어보면 어떨까? 

강 흥미로운 제안이다. 다만 국가와 정부가 시민사회를 활성화할 것인지, 저해할 것인지, 시민사회로 들어와서 시민사회들을 서열화하거나 계열화하는 것은 아닐지에도 주목해야 한다. 일본에서 자민당 총재가 된 아베 신조의 외조부는 기시 노부스케이고, 한국의 대선 후보인 박근혜의 아버지는 박정희인데, 각각 일본과 한국에서 국가중심주의에 바탕을 둔 전후 체제를 이룬 핵심 인물이었다. 물론 기시-박정희의 정치가 오늘날 다시 반복될 것이라 보지는 않지만, 아베와 박 후보에게서 그들의 유전자(DNA)가 감지되고, 여전히 한국과 일본에서는 국가중심주의적 사고가 강하다. 

한 ‘상식을 갖춘 시민들’은 정치적으로 큰 영향을 끼치지 못하더라도 꾸준히 진화하고 있다. 정치적으로 표현되지 않은 그들의 에너지를 조직화하지 못하고 정확한 호명을 하지 못해서 문제이지, 그 잠재력은 분명하다고 본다. ‘동아시아 시민 바로미터’는 그것을 조직하고 호명하자는 것이다. 

강 고 김대중 대통령은 ‘행동하는 양심’을 말했다. 한 교수가 말한 ‘상식 있는 시민’은 바로 그 행동하는 양심을 가리키는 것이 아닐까 한다. 한 사람 한 사람이 ‘행동하는 양심’을 지닌 사람으로서, 정확히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고 행동한다면 앞으로 시민사회가 발전할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정리/최원형 기자 circle@hani.co.kr

원문: 한겨레/ 2012-09-27  
         http://www.hani.co.kr/arti/culture/religion/553756.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