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하공생"의 세계관으로 지구적 위험 대처
사회학자 한상진 서울대 명예교수가 지난달 20~21일 독일 포츠담 기후변화연구소에서 열린 ‘코스모-기후’ 연구프로젝트를 위한 첫 워크숍에 참가했다. ‘위험사회론’으로 유명한 울리히 벡 독일 뮌헨대 교수가 유럽연합(EU) 지원으로 진행하고 있는 이 프로젝트는 서구와 동아시아를 비교하는 관점에서 초국적 위험공동체의 문제를 다룬다. 동아시아 공동연구자로 이번 모임에 참석한 한 교수의 참가기를 싣는다.
울리히 벡, ‘해방적 파국’ 강조
‘제2근대’는 항구도시가 주도
풀뿌리 정체성 ‘시민집단’ 주목
‘제2근대’ 진입에는 몇 개의 통로가 있다. 첫째는 위험사회에 대한 근원적인 성찰로부터 시작하여 시민의 안전을 보장하는 위험 거버넌스의 구축이다. 둘째는 개인화로 불리는 역사변동이고, 셋째는 국민국가의 뒤를 잇는 초국적(코스모폴리탄) 변동이다. 뉴미디어가 여는 소통혁명도 중요하다. 이렇게 보면, 지난 11월20~21일 독일 포츠담에서 열린 ‘코스모-기후’ 연구사업을 위한 첫 워크숍은 셋째 주제를 집중 조명하는 의미를 갖는다. 그러나 포츠담의 주제를 대하는 나의 마음은 착잡했다. 서구는 유럽연합을 창설하여 제2근대의 문지방을 넘었지만, 동아시아는 아직도 과거에 발목이 잡혀 갈등과 불신의 골이 깊어지고 있지 않는가? 질주하는 자본주의, 악화하는 지구환경, 파국적인 양극화의 추세 앞에서 인류의 생존과 시민의 안전을 지키려면 국민국가, 민족감정을 넘는 새로운 초국적 협력의 길을 걸어야 한다. 그런데 동아시아는 정반대의 길로 가고 있지 않는가?
이런 복잡한 속내로 토론을 바라보는 나에게 몇 가지 중요한 돌파구가 열렸다. 가장 중요한 것은 벡 교수의 제안이다. 그는 기후변화와 같은 지구적 위험을 인류종말과 같은 공포의 시각이 아닌 ‘해방적 파국’의 눈으로 보자고 제안했다. 미래의 위험이 날카롭게 지각될수록 불안을 넘어 새로운 연대로 이를 극복하려는 운동이 강화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위기를 희망의 근거로 보는 오래된 비판이론의 전통과 맥을 같이하는 것이다. 이런 눈으로 변혁의 대중적 에너지가 어떤 구조, 지역, 문화, 행위집단에서 강하게 나오는가를 찾자고 제안했다.
이에 호응하여 영국 랭커스터대학의 데이비드 타이필드 교수가 가장 인상적인 논문을 발표했다. 그는 학부에서 화학을 전공한 사회학 교수로서 기후변화의 궤적을 정밀 추적하는 기술 전문가다. 그러나 그는 과학기술의 처방과 국민국가 중심의 여론형성, 패권적 세계정치로 기후변화 문제를 다루는 것은 한계가 자명하다고 지적했다. 대신 그는 문명의 관점에서 우주의 질서에 상응하는 정치모형의 재구성을 제안했다. 특히 기독교 문명의 근원인 유대교와 중국의 유교, 도교, 불교의 세계관을 재조명하여 국경, 인종, 문화의 경계(차이)를 넘는 진정으로 열린 화해(조화)의 정치모형을 구축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역설했다.
이런 토론에 자극을 받아 동아시아 문명의 계보가 의제로 떠올랐다. 우선 ‘코스모폴리타니즘’의 번역 문제가 제기되었다. 이 용어는 통상 ‘세계화’ 또는 ‘세계주의’로 번역되는 ‘글로벌라이제이션’과 구별되지만 적절한 번역이 쉽지 않다. 이에 나는 유교의 뿌리에 있는 ‘천하’의 개념과 도교, 불교의 뿌리에 있는 ‘공생’의 개념을 결합하여 ‘천하공생’의 개념으로 이것을 옮기는 것이 바람직하고, 또 코스모폴리타니즘의 문제의식을 서구보다 더 풍부하게 발전시킨다고 주장했다. 인간과 인간, 국가와 국가의 관계를 포함하여 인간과 자연, 하늘 아래 모든 것들의 생태적 의존관계를 잘 표현해주는 천하공생의 세계관으로 기후변화와 같은 지구적 위험을 다루는 것보다 문화적으로 더 자연스러운 것이 어디 있겠는가?
이런 난상토론이 뜻밖에도 워크숍에 큰 활력을 불어넣었다. 처음부터 이 모임은 ‘코스모폴리탄’ 변동의 진정한 뜻이 무엇인가, 이것이 세계화 등과 어떻게 다른가를 명확히 하려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것이 쉽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동아시아 문화전통으로부터 천하공생의 개념지평이 열리면서 이에 요구되는 다양성, 보편성, 자발성, 개방성, 상호의존성, 참여지향성, 생태정의, 지구적 정의 등이 변동의 주요 지표로 떠올랐던 것이다. 때문에 벡 교수는 향후 모임의 의제와 방향이 설정되었다며 이 토론을 반겼다.
다음으로 얻은 큰 소득은 제2근대건 천하공생이건 주요 시험장은 국가보다는 도시, 특히 항구도시라는 점이다. 항구는 물류이동, 인적 왕래, 문화교류 등에서 원래 개방적이고 세계의 변동에 민감하다. 더욱이나 항구도시는 해양과 맞닿아 있으므로 기후변화에 따른 지구온난화, 바다 수면의 상승에 비상한 관심을 공유한다. 경직된 중앙정부에 비해 지방정부는 훨씬 유연하게 해외 도시와 동반발전의 협정을 맺고 조약을 체결한다. 공동으로 녹색도시, 생태친화도시를 지향한다. 따라서 제2근대의 주역은 국가가 아니라 도시라는 명제가 나올 법하다.
이에 관해 덴마크 코펜하겐대학의 아네르스 블로크 교수가 선구적 연구 결과를 선보였다. 그는 오사카, 요코하마, 타이베이, 상하이, 톈진, 싱가포르, 서울(인천), 홍콩 등 동아시아 6개 도시에 유럽의 마르세유, 오슬로, 코펜하겐, 바르셀로나, 암스테르담, 로테르담, 함부르크, 런던을 합친 16개 항구도시에 관하여 여러 정보원에서 환경, 생태, 건축, 교통, 에너지 관련 자료를 수집하여 ‘도시 기후정치 지표’를 구성하였다. 이 연구는 아직 초기 단계에 있지만 서울은 관련 사업의 수적 규모에서 4위다. 특히 다른 시정부는 사업의 평균 60~70% 정도를 주도하고 나머지는 사기업, 중앙정부, 비영리단체 등이 차지하는데, 서울은 시정부가 100% 사업을 이끈다. 따라서 제2근대의 진입과 천하공생의 발전에서 서울시의 선도적 역할에 적지 않은 관심이 모이게 되었다.
방법론에 관한 난상토론도 인상적이었다. 이 연구를 이끄는 벡 교수의 역할과 리더십에도 불구하고 일관된 방법론의 결여를 시종일관 날카롭게 지적한 영국 런던정경대의 사빈 셀쇼 교수가 대표적이다. 그는 푸코 이래의 언술이론의 관점을 택하여, ‘위험공동체’의 발상이 어떻게 사회적으로 구성되는지를 살펴야만 비로소 행위자의 문제를 제대로 파악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런 논의를 거쳐 우리는 지구적 위험공동체에 작용하는 도덕의 자원을 심도 있게 다루게 되었다. 이에 관해 나는 2011년 일본 후쿠시마 재난을 보기로 삼아, 국경을 넘어 피해자를 돕는 사후대응도 중요하지만 사전예방의 적극적 접근이 중요하다고 논하고, 원자력발전소의 안정성과 증설에 대한 태도를 교차시켜 에너지에 민감한 ‘기술-도덕’과 위험에 민감한 ‘생태-도덕’을 구별하였다. 그리고 2012년에 실시했던 베이징-서울-도쿄 시민의식조사 자료를 분석했다.
그 결과, 놀랍게도 에너지에 민감한 기술-도덕이 베이징 시민들에게서 압도적으로 높은 반면 도쿄 시민들 사이에서는 위험에 민감한 생태-도덕이 압도적으로 높은 것을 발견했다. 차이가 매우 컸다. 아울러 서울-베이징-도쿄를 관통하는 공통점도 발견되었다. 어느 도시에서건 풀뿌리 중류층(중민)은 안전판 중류층보다, 그리고 풀뿌리 하류층(기층민중)은 안전판 하류층보다 훨씬 더 생태진화적 도덕이 강한 것으로 분석되었다. 이것은 풀뿌리 정체성을 획득한 시민집단이 천하공생과 제2근대의 변화를 이끈다는 점을 여실히 보여준다. 그 의미를 둘러싸고 활발한 토론이 이어졌다.
토론을 끝낸 뒤 참여자들은 내년 여름 각 연구주제에 상응하는 동아시아 파트너가 참여하는 제2차 모임을 서울에서 열기로 합의했다. 이로써 올해 9월 말 중국 칭화대에서 열렸던 동아시아 학술 모임, 11월 포츠담의 유럽연합 프로젝트에 이어 서구와 동아시아를 잇는 본격적인 제2근대 진입 논쟁이 2014년 서울에서 이루어질 전망이다.
포츠담/글·사진 한상진 서울대 명예교수(사회학)
원문: 한겨레 / 2013-12-02
http://www.hani.co.kr/arti/culture/religion/613482.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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